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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의 시작과 역사

형평운동기념사업회 0 67
가. 들면서 
 
'평등 사회'는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려는 인류의 주요 소망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평등사회는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사람답게 존중받지 못하고, 또 제각기 다르게 매겨진 사람값에 따라 차별받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지만 평등사회를 이루려는 노력은, 특히 근세기에 들어서 집합행동의 형태로,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 따라 내용도 다르고 활동 모습도 다양하지만, '사회평등'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역사 방향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인간 사회의 평등을 지향한 집합적 노력은 우리 역사에도 있었다. 그러한 노력의 가장 대표적인 보기가 1920년·30년대에 일어난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창립되어 1935년까지 유지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 이 형평운동은 조선 오백년 동안, 아니 그 이상 오랫동안 천민중의 천민으로 차별을 받아온 백정(白丁)들의 인권 존중과 평등 대우를 주장한 사회 운동이었다. 그 말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또 대대로, 온갖 차별과 멸시를 감내해야 했던 백정들의 작업 도구인 "저울[衡]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사회운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듯 형평운동의 바탕에는 차별과 억압의 비인간적인 불의(不義)로 점철되어 온 우리 역사의 아픔이 깔려 있다. 그것은 또한 그 불의에 저항하며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평등하게 보장받으려는 용트림의 역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형평운동은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역사 과정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제공해주며 힘을 실어주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나. 형평운동의 개요
  
형평운동이란 종래의 봉건적 신분제도 하에서 최하층 천인으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오던 백정이 1920년 이후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근대적 의미의 인권 회복을 위해 일으킨 해방운동이다. 구체적으로는 1923년 4월24일 경남 진주에서부터 비롯된 "형평사"의 결성에서 시작되어 1935년 대동사로 그 명칭이 바뀔 때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며, 일제 식민지 하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사회운동이었다.

이러한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일차적으로 그것은 그 시대 백정의 사회적 위치나 차별 대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1920년 당시 진주의 인구가 2만4천 여명이었고, 그 중에서 약 350명 정도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봉건적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백정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의 보기를 몇 가지 들어보면, 1907년 진주의 교회에서 일반교인들이 백정들과 동석 예배를 거부한 사건이나, 백정의 자제들이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상민 자제들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봉건적 신분제 하에서 같은 천민 신분이었던 기생들조차 백정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형평사가 만들어진 원인이나 배경에 대해서 백정들의 차별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형평운동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형평운동이 특별히 진주에서 시작된 배경으로 진주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초 진주에는 각 부문에서 직업적 운동가들이 주도한 민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진주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 진주노공이 이끌어간 노동, 농민운동, 각 종교단체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던 여성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비교적 일찍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고, 근대적인 공·사립의 교육기관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교육기관은 각 부문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직업운동가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또한 진주의 역사적으로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진주의 정치·문화적 바탕이 조성되었고,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농민군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적·역사적 조건을 바탕으로 하여 형평운동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백정사회에 축적된 경제적 지원이었다. 전통적으로 백정들은 일반인들이 꺼려하던 도살업, 고기판매업, 유기제조업 등 특수한 직종에서 일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일반인들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많은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었고, 19세기말부터는 도살업이나 고기판매업이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으로 바뀌어갈 정도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진주 공설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있던 비교적 경제력이 있는 백정 상인들이 형평사를 만드는데 적극 참여하여 실무적인 임원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형평운동은 일제 하까지 지속된 사회적 차별대우와 진주의 직업적 운동가와 경제적 부를 축적한 백정들의 결합에서 1923년 4월 24일 형평사의 창립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1923년 4월 25일 진주극좌(현 진주극장)에서 열린 발기총회 때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 위원 :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이학찬
  • 간사 : 하석금, 박호득
  • 이사 : 하윤조, 이봉기, 이두지, 하경숙, 최명오, 유소만, 유억만
  • 재무 : 정찬조
  • 서기 : 장지문
위원 중에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등은 비 백정으로서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출신의 직업적 운동가들이었고, 나머지 장지필, 이학찬등은 백정의 후예로서, 장지필의 경우 일본에서 유학하고 난 뒤 총독부에 취업을 시도하였지만 민적등본의 도한 표시로 좌절한 뒤 형평운동에 뛰어든 지식인 출신이었고, 이학찬은 진주공설시장서 고기판매업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을 갖고 백정사회를 지도하던 인물이었다.

이 밖에 간사, 이사, 재무, 서기의 실무 부서를 맡은 사람들은 모두 백정 출신으로 어느 정도 경제력을 축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형제나 같은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형평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직업적 운동가들과 백정사회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형평사의 주지는 "我等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아등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 운동을 감시하던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창립 1년만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생겼고, 1928년에는 단위 조직체가 162개, 활동가 수가 9688명에 이르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확산되어 갔다. 당시 일제가 공식 파악한 백정이 3만 3천 여명이었으므로 그 조직률은 23%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원이 대개 성인 남자였음을 감안할 때, 백정으로 밝혀진 거의 모든 백정 가구가 이 조직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형평운동에 대한 최초의 반대 움직임도 진주 지역에 있었다. 진주의 기생조합은 형평사의 창립축하식 여흥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봉건적 신분제 하에서 같은 천민신분이었던 기생들조차 형평운동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백정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적으로 암시해 준다. 비 백정들의 보다 적극적인 반대 움직임은 1923년 5월 24일 진주 지역의 24개 동리 농청 대표자들의 모임에서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날 비 백정들과 형평사원들과의 집단충돌이 발생하게 되자 5월 26일 24개 동리의 농청대표자 70여명은 진주 의곡사에 모여 백정들뿐만 아니라 형평사에 관계된 모든 사람과 단체들까지 배척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실 진주 청년회, 진주노공 등과 같이 진주지역의 민중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는 물론이거니와, 진주지역 이외에서도 북성회, 평문사, 점진사, 적기사등의 사회주의 계열단체의 후원, 그리고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조차 형평운동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평사를 반대하고 공격한 농청의 배후에는 지주들과 보천교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진주 지역의 소작 운동을 주도해간 진주노공에 대해 지주계급의 인식이 호의적일 수 없었고, 보천교 측에서도 보천교 반대운동을 벌이는 진주 지역의 운동단체들을 형평운동에 대한 반대를 통해 파멸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농청을 중심으로 한 반대 움직임은 진보적인 민중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지배집단과 보수세력의 대응운동의 성격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진주 각 단체 연합회에서 공동대처 방안을 강구했고, 진주노공에서도 소작운동을 지도하여 얻은 신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 진주 지역의 형평운동 반대 움직임은 비교적 원만한 해결을 보게된다.

한편 형평운동 당시의 통치 세력인 일제는 우려와 관망의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나의 보기로서 형평사원과 농청세력간의 충돌에 즈음하여 그는 농청 대표자들에게는 "일본에서 예다를 평민과 같이 대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공한 일도 없다. 형평사도 그렇게 될 것이니 농청에서 간섭할 것이 없다"며 그들을 무마하려 했고, 형평운동의 지도자들이 민적의 표시를 없앨 것을 요구했을 때 즉각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형평운동과 일제의 식민지 통치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따져보아야 할 과제인데, 갑오개혁을 통한 신분제 해체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지하에서 총독부의 대 백정정책이 형평운동의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진주를 시발점으로 하여 김해, 제천, 수원 그리고 경북 예천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간 반 형평운동과 함께, 형평사의 조직확대에 따라 운동단체 내부에도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창립 1년만에 열린 1924년 2월의 "형평사 전조선 임시총회"는 49개 郡에서 3백 여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으나, 바로 여기에서 형평사 중앙본부의 서울 이전을 주장하는 서울파(북파)와 진주에 본부를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는 진주파(남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장지필을 지도자로 하는 서울파는 1924년 4월 서울에서 형평사 혁신동맹 총본부를 발족시켜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방의 백정들 사이에서 형평운동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그해 8월 "형평사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일단 통합된다. 이때의 통합은 장지필, 강상호의 공식 사퇴와 함께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됨으로서 1925년 4월 화요회 주체의 전조선 민족운동자대회에 가맹하는 등 사회운동 일반과의 제휴를 활발히 모색했고, 조선형평 청년총연맹의 조직을 통해 내부적으로도 조직이 체계화 되어갔다. 또한 1926년의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 서광호 등 수명이 검거됨으로써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단체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내지 사상단체로서 그 성격이 명확히 전화되어갔다. 그러다가 1928년 형평사 내부에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에 중점을 두는 온건파와 계급투쟁의 측면을 중시하여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급진파의 출현을 가져왔고, 이후 양파는 신간회 해소를 다른 부분 운동단체와 마찬가지로 1931년 형평사 해소문제를 둘러싼 격론을 거쳐, 결국 1935년 대동사로 개칭되면서 일제에 타협적인 융화주의의 길을 걷게 됨으로서, 형평운동은 식민지하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부문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여 갔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은 단순한 계급투쟁이 아니라 교육운동, 인간성 회복운동,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통해서 백정들의 자기해방 내지 민족해방을 도모하려 했다. 물론 이 연합전선은 형평사 내부의 분열과 사상적 분화를 초래하여 많은 진통을 겪었지만,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비롯된 사실과 함께 지역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 지방자치 또는 지역운동의 차원에서 오늘날 우리 민주 민족운동에 중요한 시사를 준다.



다. 정리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민중운동의 역량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일제 식민통치방식의 전환으로 민족해방운동의 공간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에 따라 진주 지역에서도 전체 민족해방과의 일정한 연관 속에서 노동·농민운동·청년· 여성운동 및 형평운동 등의 각 부문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전체 민족해방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진주노공과 형평사의 활동은 진주 지역을 지역부문운동의 최선진지역으로 자리 매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진주 지역에서는 진보적 성향의 민중운동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상류층이 참여한 온건한 개혁지향의 흐름으로 무직자구제회, 저축계, 부업장려회, 공존회, 기근구제회 같은 단체들이 있었다. 또한 전국적인 추세에 따라 조직된 민립대학발기회, 금주단연회 등은 1920년대 초 부르주아적 민족운동 내부에 친일 지향적 타협세력과 반일적 비 타협세력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채, 하나의 사회운동 범주로 진행되었던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의 지방적 확산에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 또 다른 흐름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지켜나가려는 경향으로 진보적 성향의 사회개혁세력에 대항하는 집단이 보인 대응운동 성격의 흐름이다. 번영회, 자선회, 조흔회, 상보회, 수양단, 지주회, 교육회, 도청이전방지동맹회 등의 단체가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 단체는 식민지하 직접적인 타도대상이었던 일본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한국인들에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일제 식민지하 반제 반봉건의 과제 속에 전국적으로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주지역은 고려 무신정권 당시 공사노비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고려민권항쟁(소위 정방의의 난)이 일어났고, 조선후기 민중 부문에서 반봉건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진주농민항쟁을 비롯하여, 농민족 코스를 통한 근대 민족운동의 결정점이었던 갑오농민전쟁 시기에도 동학농민군의 영향을 비교적 강하게 받고 있었던 지역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일제하 특히 1920년 진주 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민중운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90년대 후반을 넘어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민주·민족운동은 전반적인 침체와 함께 총체적인 개량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주·민족운동의 올바른 위상정립과 방향전환을 도모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여있다. 더욱이 모든 것이 중앙집권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1920년대 진주지역의 민중운동에서 우리는 전체 변혁운동의 지역부문 운동으로서의 의의를 올바르게 자리 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변혁운동은 위로부터의 운동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지방자치 내지는 지역운동의 활성화 차원에서 훌륭한 역사적 전통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역사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역사를 무조건 무시하려는 양극단의 폐단에 놓여있다. 그리하여 전자의 경우 배타적인 국수주의나 지역주의에 매몰되기 쉽고, 후자는 역사적 허무주의 내지 냉소주의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형평사 주지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本社)의 주지(主旨)이라.

오늘 조선의 우리 백정은 여하한 지위와 여하한 압박에 처하였는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 통곡의 피눈물을 금치 못할 바라. 이에 곡절과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가도 없이 목전의 압박을 절규함이 우리의 실정이요, 이 문제를 선결함이 우리의 급무로 인정할 것은 적확한 지라.

낮으며 가난하며 열등하며 약하며 천하며 굴종하는 자 누구인가? 슬프다! 우리 백정이 아닌가! 그런데 여차한 비극에 대한 이 사회의 태도는 여하한가? 고위 지식 계급에서 압박과 멸시만 하였도다. 이 사회에서 우리 백정의 연혁을 아는가 모르는가? 결코 천대를 받을 우리가 아닐지라. 직업의 구별이 있다 하면 금수(禽獸)의 목숨을 뺏는 자가 우리 백정뿐이 아닌가 하노라. 본사(本社)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의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조선민족 이천만 중의 한사람이라도 애정으로써 상호 부조하야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존립 책을 꾀하고자 이에 사십 여만이 단결하여 본사를 세우고 그 주지를 천명해 표방코자 하노라. 


1923년 4월 24일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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