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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밝히는 진실 (강인수)

형평운동기념사업회 0 74

60년 만에 밝히는 진실 


 

 

 

저는 항간에 보통 “형평운동가 독립운동가 강상호(栢村 姜相鎬)” 로 호칭되고 있는 분의 아들, 강인수(姜寅洙, 72세)입니다. 제 나이가 벌써 고희를 넘고도 2년이 더 되었으니 이제는 60년간 죄인처럼 침묵해온 진실 하나를 밝혀야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6. 25 전쟁 때 제 아버지(栢村 姜相鎬)가 진주시인민위원장을 했다는 헛소문이 60년이 흘러간 지금에도 일부 보도와 출판물에 나돌아 이에 대한 항변(抗辯)입니다. 


 

우리 아버지(栢村 姜相鎬)는 대한독립을 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하고, 3.1 운동을 하고, 민족계몽교육을 하고, 형평운동을 하고, 언론 출판을 하는 등 나라 위한 일과 사람 사랑하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친일 행각을 한 일도, 공산주의 활동을 한 일도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가 뭐래도 우리 아버지(栢村 姜相鎬)는 나라와 국민 앞에 잘 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하였음에도 칭송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마치 공산주의자나 친일파가 되었던 것처럼 당치도 않은 헛소문이 일부 출판물이나 보도 등에 나돌아 유족인 저희에게 큰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이하 존칭어 생략) 

 

 

백촌(栢村)은 일제말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총독부의 압력과 간계에 의하여 형평사(衡平社)의 간판이 내려지고 대동사(大同社)의 간판이 달린 후, 형평운동의 그 본래의 그 신선한 취지와 정신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보고 속수무책으로, “이제는 내가 형평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 아! 피곤하다” 하며 뒤늦게나마 세월에 바래 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흐트러진 당신의 가정을 돌아보며 사회와 일체의 인연을 끊고 거의 은둔생활(隱遁生活)로 들어가다시피 진주시 봉곡동 427번지에서 아내 이갑례(李甲禮)가 생업을 위하여 벌린 양잠업(養蠶業)에 전심전력으로 참여하는 작은 농부가 되어 있었다..........생략 


 

그러하였음에도 백촌은 여생을 정리하는 조용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시 험난한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갔었다. 그것은 광복 후 신생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격변기(激變期)에 좌우양파(左右兩波) 모두의 지도자들이, 악의(惡意)이던 선의(善意)이던, 백촌을 그들의 협력자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본인의 의사(意思)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임의로 추대(推戴)하였으며, 백촌은 그로인하여 피해자가 된 것 뿐이었다. 


 

백촌은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광복 후 좌, 우파 어느 쪽이던 백촌을 자기들의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성가시게 하였다. 그러나 백촌이 그들의 협력자가 되지 못할 때에는 반대로 그들의 적이 되어 오히려 탄압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백촌은 동포간의 골육상쟁에 비애와 분노를 느낀 사람이었으며 오로지 바라는 것은 평화롭고 남북이 둘로 갈라서지 않는 하나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었다.........생략.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복 후 크게 성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추진하는, 친일극우파 개국역군(開國役軍)들에게는 항일독립운동가인 백촌은 숙명적으로 탄압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던 독립운동가 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남북분단의 골육상쟁을 예상하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과 같은 밝힘이다 

 

 

당시의 사건 하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김경현(경남근현대사연구원, 친일진상규명위원)씨는 그가 집필한 ‘명석면사(鳴石面史)에서❴특히 강상호 선생은 진주시인민위원장을 했다고 오해를 받고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상 근거 없는 낭설로 추측된다. 당시 진주시인민위원장은 김인세로 대검찰청의 ‘좌익사건실록(左翼事件實錄)’ 에 기록돼 있다. 김인세는 현재 오미리에서 제일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는 김건호 사장의 작은 아버지(仲父)이다. 김 사장은 “존경하는 나의 중부님이 6. 25당시 진주시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강상호 선생이 6. 25 때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강상호 선생이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면 6. 25 전의 일이가나 와전된 이야기일 것이다.” 고 말했다.❵라고 밝혔으며, 또한 김경현 씨는 진주신문 제 649호(2003. 3. 5) 의 3.1절 및 형평운동80주년기념 특집기사에서도 “강상호 선생이 빨갱이였다는 마다도어는 그가 한국전쟁 때 인민위원장이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이야기는 정말로 낭설이다. 우리나라 대검찰청이 작성한 ‘좌익사건실록’이란 기록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 진주시인민위원장은 김인세로 밝혀져 있고 필자가 직접 김인세의 친 조카로부터 사실 확인까지 하였다.” 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백촌은 진주시인민위원장이란 감투를 쓴 일이 없다. 6. 25 전쟁 당시에는 중안초등학교 서우용 교장선생님과 같이 명석면 왕지리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군 공작대원 같이 보이는 두 분이 총을 메고 찾아와 백촌을 연행 해간 사실(이틀? 후에 풀려 나옴)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백촌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호의적인 제안도 사양하였을 것이다.........생략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백촌은 광복 후 UN 감시 하의 남북통일총선거에 의한 단 하나의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원하였기 때문에 친일극우파들에게 큰 성가신 인물로 낙인 되었었는지, 광복 직후 특무대나 아니면 경찰서에 연행되어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머니와 나는 진주경찰서 앞 배영초등학교 정문 근처에서 머뭇거리며 아버지(백촌)가 경찰서에서 풀려 나오기를 기다린 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에는 배영초등학교와 경찰서 사이에는 집 한 채 없는 넓은 공간이 있었으며 그 빈터의 북쪽에는 군 특무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보다, 경찰서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을 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경찰서 이층 창문에 어떤 경찰관 아저씨였다. 바로 그 아저씨 옆에서 아버지(백촌)가 손짓을 하며 이층으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나는 이층 복도에서 안내를 받으며 아버지(백촌)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올라 가보니 아버지(백촌)와 경찰관은 담소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백촌)는 그 다음 날 풀려 나왔다......... 


 

이것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죄 없이 구금된 아버지(백촌)에게 담당 경찰관이 특별히 베풀어 주는 면회였다. 또 한 번은 특무대인지 몰라도 신분을 알 수 없는 기관(機關) 사람들에 의하여 아버지(백촌)가 경남 산청까지 연행되었었는데, 어머니가 그 대장님이 묵고 있는 호텔 같은 데로 찾아가 두 손을 빌어 그 다음 날 풀려 나 온 적도 있었다. 이렇게 광복 후 아버지(백촌)는 아무런 죄도 없는 데,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한 일도 없는 데, 툭 하면 붙잡혀가 편안할 날이 없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되다가 백촌은 결국 본인 모르게 명실상 반공단체로 포장된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이란 단체에 누군가에 의하여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이다. 백촌 뿐만이 아니고 그의 동생인 강영호(아동문학가)도 함게 그 명단에 올라 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경남일보(2003-05-28) 기획연재의 <정동주의 진주문화사이야기 90. 그날 ⑫> 에서 정동주(시인. 소설가)씨는 “온건 보수주의자와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해방 정국의 주도권에 편승한 사람들 대부분이 일제 때는 극열한 친일로 권력과 부를 누렸던 자들이요, 그런 그들의 눈에 강영호의 소년운동과, 일제를 이롭게 하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살아온 행동은 매우 두렵고 불편한 것으로 판단되었지요. 강상호의 생애 또한 그들에게 몹시 부끄럽고 반성을 촉구하는 힘으로 작용했지요, 특히 3.1동지회를 이끌고 있는 강상호를 그대로 두고는 이들이 마음대로 설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머지 이들 형제를 좌익으로 몰아 ‘보도연맹’이란 명단에 포함시켜 버린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의 시작이었다. 결국 6. 25 전쟁이 일어나자 대 민족학살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백촌은 양심 있는 경찰관으로부터 엄밀하게 “학살(총살) 지령이 내렸으니 속히 피하라” 라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으며, 백촌은 진주 형평사원들의 도움을 받아 급이 피신을 하였다. 


 

그러나 정의감이 투철한 동생(강영호)는 이에 반항하여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를 잡아가” 하며 설마 하는 생각으로 피하지 않았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아니다 다를까 그날 밤에 경찰인지 특무 헌병인지 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동생(강영호)을 붙잡아 갔으며 그 후 영영 백촌의 동생(강영호)은 돌아오지 못하였다....... 


 

죄없는 백촌은 이렇게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국군의 수도 탈환 및 6. 25 전쟁이 끝난 직 전 후에도 피신하여야만 하였으며, 결국은 정든 집을 떠나 처가가 있는 진양군 일반성면 남산리로 이사를 가게된 것이다. 이렇게 얼마동안 피신한 후 6. 25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어느 정도 복구되어 가면서 치안질서도 정상을 되찾으면서 부터는 백촌은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문책을 받지 않았다.........생략 


 

그리 하여 그 아들인 나는 “국민보도연맹”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던 나머지 다음과 같이 ‘돌팔매질’ 란 제목으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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